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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5852007/08/23 4:15:02조회수 129

BF101......대우버스의 설립자 김창원



신진자동차의 창업주 김창원

신진자동차의 창업자인 김창원 사장은 1917년 공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조치원에서

초등학교를 졸업 한 뒤,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 가 고학으로 어렵게 상업학교를 졸업 했다.

6.25사변이 나기 전 김사장은 형님 김제원씨와 함께 마침 대전에서 일제시대 일본인이

경영 했던 조선리연항공기 기계 회사를 인수 했다. 이 공장은 일제 말기에 설립 된

기계공장으로 일본 군용차와 전투기의 부속품을 만들던 곳인데 공주에서 출생 했던

일본수상 다나까가 청년시절 근무 했던 업체였다

김창원은 조선리연공장을 인수 한 뒤 한국리연공업사로 이름을 바꾸고

자동차 엔진 부속품을 만들어 미8군과 국군창설 이전의 우리 국방경비대 차량용으로

납품하는 기회를 얻어 군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는 배짱 좋고 사교술이 능한데다가

박력 있는 사업가였다. 그러나 그가 사업을 늘려 갈 무렵 6.25사변이 터지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 다행이 그의 대전공장은 폭격을 면해 다시 가동 할 수 있었으나

군납을 받는 육군병기창과 폐차 된 미군용차를 불하 하는 미8군 보급창이 부산에

들어서는 바람에 김씨 형제는 의논 끝에 피난을 갔던 부산으로 공장을 옮겼다.

이 때가 1954년, 부산으로 내려 온 두 형제는 본격적으로 자동차사업을 벌이기 위해

부산 전포동에 있던 미군 모터풀(정비소)을 불하 받아 그곳에 공장을 세운 후 부속품을

만드는 한편 군용차와 민간차의 수리 제작사업을 위해 1955년 2월 신진공업사라는

자동차공장 간판을 달았다. 바로 이 공장이 지금의 대우버스의 전신이다.

이 해 10월 마침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가 열렸을 때 김창원씨는

자동차 기술자인 이갑부, 거부씨 형제를 만나게 되었다. 이 때 최무성씨의

시발차가 전시 된 것을 보고 김창원씨는 상당한 감명을 받았으나

이갑부씨의 승합차에 더 큰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김창원씨는 그의 탁월한

자동차 기술에 반해 그 자리에서 이씨를 신진공업의 책임기술자로

초빙 하는데 성공 하고 부산공장으로 데려와 자동차 수리, 개조 등 현장업무

일체를 맡겼다. 김창원씨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훌륭한 기술자를 발굴 하는 눈도 예리했다.

이갑부씨의 동생 거부씨는 서울의 드럼통 버스왕 하동환씨의 매부였다.

경기도 시흥 태생인 이갑부, 거부 형제는 일제시대부터 자동차 정비업에

종사 하던 기술자로 당시 서울에서는 두 형제의 기술을 따를 자가 없을 만큼

자동차 수리, 개조에도 일가견을 가졌다. 육이오 사변 후 전쟁의 폐허에서 우리나라를

복구 하고 재건 하기 위해서 유엔부흥기구인 운크라(UNKRA)가 지원 하는 20만 달러를

대한자동차협회의 도움으로 받아 신진공업은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었다.

김창원씨는 이 돈으로 1958년에 공장을 현대식으로 개조, 2년만인 1960년 5월에 완공 했다.

그러다가 5.16 혁명 직후인 1962년 10월 덕수궁 산업박람회에 출품 했던 마이크로버스가

상공부장관상을 수상 한 것을 계기로 정부는 신진공업의 실력을 인정 하고 비로소

자동차를 정식으로 만들 수 있는 대형 및 중형자동차 제조공장 허가를 해 주었다.

신진공업주식회사를 종합자동차 메이커로 키운 김창원씨는 새나라 자동차처럼 새로운

제조설비와 기술을 가진 현대식 자동차공장으로 발전 시키기 위해 제휴 할

일본의 자동차 메이커를 물색 하기 시작 했다. 마침 일본 메이커들이 한국시장 진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여서 김창원 사장의 의도를 알고 도요다, 미츠비씨, 이스즈 등이

서로 방문초청장을 보내 왔다. 도요다, 미츠비씨, 이스즈 등 일본의 대 메이커들은

닛산의 블루버드가 새나라 자동차를 통한 한국진출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을 보자 다시

상률 할 기회를 노리기 시작 했다. 자동차 불모지나 다름 없는 한국시장은 일본 자동차회사들의

야망을 충족 시킬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곧이어 김창원씨는 면세도입과

외환낭비로 혁명정부 초기의 4대 부정사건에 휘말려 63년 문을 닫았던 경기도 부평의

새나라 자동차 공장(현재의 GM대우)을 인수 받아 신진자동차공업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 한일간에 국교정상화가 되지 않고 있어 지금처럼 본격적으로 내놓고

협상 할 형편도 못되었다. 그래서 우선 국내의 대표적 자동차 기업인 기아산업이나 신진공업, 하동환자동차에

추파를 던지는 방법으로 한국 진출을 노렸던 것이다. 때를 놓치지 않고 김창원씨는 일본 제일의

도요다 자동차를 선택하여 업무제휴를 맺는 등 신진자동차의 천하제패를 위한 사나이의 야망은 끊임 없이

용솟음쳤다. 이어 도요다가 만든 소형승용차 코로나를 분해식으로 도입 하여 조립 생산 해

1960년대 말까지 승용차시장을 독점 하며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이렇게 그는 배짱과 사업수환을

발휘 하여 국내 최초로 거대한 종합자동차회사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곧이어 경쟁사인 현대자동차와

아시아자동차가 등장 하고, 도요다자동차가 중국으로 진출 하기 위해 신진자동차에서 철수 하는가 하면,

다양한 기업들을 인수 하여 큰 기업군으로 확대 시켰으나 부실경영 등으로 회사는 기울어지기 시작 했다.

그러나 김창원 사장에게 사업의 행운은 끝나지 않았다. 도요다의 철수와 때를 같이하여 한국 상륙을

노리던 세계 최대의 미국 자동차회사인 지엠과 손을 잡게 된 것이다. 72년 6월 지엠과 50:50의 자본투자로

신진자동차는 사라지고 대신 지엠코리아를 세워 다시 일어섰다. 그러나 새로 생산 한 지엠의 1700씨씨급 소형차

'시보레1700'의 오일쇼크로 인한 판매부진과 무리한 사업 확장 등으로 누적된 큰 적자 때문에 경영난에 빠지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김창원 사장은 결국 신진자동차 지분 50%를 정부관리로 넘겨주고 말았다.

이 위대한 한국 자동차산업 개척의 거인이었던 김창원 사장은 지엠코리아를 새한자동차로 넘겨준 뒤

신진지프, 신진자동차학원, 수산업 등을 운영 하다가 97년 80세를 일기로 파란만장의 생을 마감한다.

댓글

2007/08/23 11:18:05
김창원? 설마 그 살인자 김창원씨는 아닌지..ㅋ(농담)
2007/08/23 11:20:00
그사람은 신창원아닌가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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